2025-04-03 16:03•조회 28•댓글 2•sweetpea_ysy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기보다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누구였던가?
기억을 기록하는 자.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아두는 마지막 존재.
그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이 나였던가?
아이는 내 침묵을 한참 바라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기억을 붙잡는 자인가요,
아니면 잊혀지는 자인가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책을 움켜쥐었다.
그 속에는 내가 기록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이름, 얼굴들이 있었다.
하지만 페이지를 펼쳐보니,
거기에는 텅 빈 공백만이 남아 있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또렷했던 문장들이
희미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불안한 손길로 페이지를 넘겼다.
한 장, 두 장.
그리고 마침내, 내 이름이 적힌 페이지를 찾았다.
그곳에는 단 한 줄의 문장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이야기꾼이었다.'
그뿐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떠올리려 했다.
내 이름, 내 과거, 내가 왜 이 책을 들고 있는지.
그러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사람들이 잊혀져가는 동안,
나는 단순히 기억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기억이 사라질 때마다,
내 기억 속에서도 그들이 지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기억을 잃어가는 세상의 마지막 증인이자,
동시에 그 희생자였다.
아이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당신 차례예요. 당신의 이야기를 기록하세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책을 펼쳐
빈 페이지 위에 펜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누구였던가?
나는 마지막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이는 미소를 지으며
한 발짝 다가와 속삭였다.
"기억해요. 당신이 누구였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