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돌아온 세상은 아니지만 ep.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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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5 10:06조회 30댓글 2sweetpea_ysy
나는 천천히 책을 펼쳤다.
빈 페이지 위에 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마지막 기억.
그 마지막이, 아이의 모습이라니.

"네가 내 기억이라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펜을 들었다.
손이 약간 떨렸지만, 그 떨림조차 나 같았다.

모든 것이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던 이유.
내가 기억을 흡수했던 이유.

그리고 이 아이가,
내가 기억을 잃어갈수록 선명해진 이유.

"나는…"
나는 펜을 종이에 댄 채, 조용히 글을 써내려갔다.

『나는 잊혀진 모든 이야기를 품은 존재였다.
나는 모든 이들의 기억을 받아 적는 자.
그리고 이 마지막 문장은, 내 이야기다.』

나는 눈을 들었다.
아이는 멀리 떠나고 있었다.

그 미소는 여전했지만, 이제
투명한 유리창 너머의 꿈처럼 흐려졌다.

"너는 누구였을까"

그 순간, 내 머릿속이 환하게 맑아졌다.
잊었던 이름들, 잊혀진 계절들,
사람들의 눈빛과 웃음소리.

모든 것이 나를 통해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펜을 내려놓고 책을 덮었다.
이제 더는 적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이야기였고, 기억이었고, 그 모든 끝에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로써, 이 이야기는 끝이었다.

"기억 속 그 조각들, 언제든 다시 꺼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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