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사라진 세상 속에서 ep.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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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3 20:05조회 38댓글 0sweetpea_ysy
나는 펜 끝을 종이에 댄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내가 써야 할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이의 말대로라면
나는 세상의 마지막 기억을 붙잡고 있는 존재였다.
아니, 기억을 흡수한 존재.

하지만 이 아이는… 어째서 나를 알고 있을까?

나는 조용히 아이를 바라보았다.
작은 손, 맑은 눈동자.
어딘가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다.

"너는… 누구지?"

아이는 잠시 말을 아꼈다.
그리고 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기억하는 자야. 너처럼."
"…너도?"
"응. 하지만 난 너와 달라."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나처럼 기억하는 자. 하지만 나와는 다르다?

"그러면 너는 뭘 기억하는데?"

아이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내 책을 가리켰다.
"그 책에 남겨진 마지막 글."

나는 책장을 다시 넘겼다. 거기에는 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이 문장, 네가 기억하고 있는 거야?"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네가
이 문장을 쓰기 전의 기억을 알고 있어."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나는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데,
네가 내 과거를 기억한다고?"
"그래."

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이가 알고 있는 나의 과거.

나는 기억을 잃고 있는데,
그 기억을 간직한 또 다른 존재.

"그렇다면… 나는 대체 누구였던 거야?"
"그건 네가 직접 적어야 해."

나는 다시 책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아이는 단순히 나를 아는 것이 아니다.

이 아이는 나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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