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26 19:52•조회 73•댓글 3•Ooㄴーろㅏl
눈을 떠보니 평소처럼 새벽하늘에 의해 푸르게 잠긴 방 안이 눈에 비친다. 충전기에 꽂혀있던 휴대폰을 키니 시계는 3시 41분이라 알려주었다. 침대 옆에선 오랜 생활을 함께 하고 있는 선풍기가 덜덜거리며 돌아가고 있고, 여름의 새벽 공기는 그리 따뜻하지 않았다. 선풍기의 전원을 끄며 침대에서 나와, 마실 나가기 위해 얇은 후드티와 반바지 한 장만 걸친 채 도어락을 열었다.
그러자 새벽 공기가 나를 반기듯 스쳐 지나갔다. 따뜻하지 않아 나를 환영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배롱나무공원에 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 보니 공원의 중앙에 배치되어 있는 벤치에 도착하였다. 여느 때처럼 같은 자리에 앉아 나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따 해가 뜨면 아침으로 먹을 토스트에 무엇이랑 곁들여서 먹을지, 최근에 망가진 볼펜을 어떻게 할 건지, 아니면 사랑에 관하여 내가 어떻게 생각 하는지, 등등. 사소하지만 다양한 고민과 생각을 정리했다.
슬슬 벤치에서 엉덩이를 때려 할 때, 누군가가 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괜스레 가려는 내가 눈치 보여 다시 앉았다. 발걸음 소리의 주인은 처음 보는 한 남성이었다. 그는 새벽 특유의 검푸른 하늘과 어울리지 않는 흑발을 하고, 널찍한 흰 티 한 장에 검은 반 바지와 슬리퍼만 신고 나왔다. 나는 그를 보고 벤치에 다시 앉았지만, 그는 나의 존재를 모르는 듯 자신만의 길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의 발걸음은 내가 앉아있는 벤치 옆 배롱나무 앞에서 멈췄다. 별생각 없이 휴대폰 좀 보다 가려 했지만 그 남자의 시선이 궁금해져 몰래 쳐다보았다. 그는 흔들림 없이 배롱나무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익숙해도 많이 익숙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보았을까? 생각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마주 보며 확신이 하나 생겼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인진 몰라도 그와 나는 인연이 있었다는 것을.
" 안녕하세요. "
그가 누군지 알아내려 머리를 굴리다, 그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 주었다. 조금 당황했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그에게 인사했다.
" 아, 안녕하세요. "
사람과 제대로 대화하는 건 11살이 마지막이었다. 그래서인지 먼저 말을 걸어준 그가 매우 어색했다. 하지만 그 어색을 깨기 위해 처음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 그 ··· "
" 혹시 왜 벤치에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
아, 말을 걸 타이밍이 어긋났다. 당황해서 마주 보고 있는데도 말을 쉽게 하질 못했다.
" 그 ··· 게 ··· "
" 괜히 엮이기 싫으시면 그냥 말 안해도 돼요. "
그건 아닌데 ··· 아니지만 그럼에도 입만 뻥긋하고 있다.
" 아, 무턱대고 물었나요? 통성명부터 하는 건데. 한새벽이라고 합니다. "
이름이 귀에 들어오니 누군가와 대조되는 기분을 받았다. 그리고 내 뇌의 한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억이 하나 발견되었다. 아직은 흐릿해서 제대로 알 순 없지만, 그가 나와 관련 있다는 건 확실해졌다. 그보다 이름이 새벽이라니, 익숙한 듯 듣기 힘든 이름이다.
" 류 ··· 류서현이라고 합니다. 이 동네에선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사 오셨어요? "
드디어 말을 잇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대화해보는가.
" 네, 최근에 이사해서 동네 구경할 겸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왕 온 거 아는 사람과 얼굴 한 번 보려고요. "
그 ‘아는 사람’이 누굴까. 궁금해지던 찰나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 어릴 때 집안 사정으로 이사 가게 되었는데, 그때 그 친구의 얼굴이 잊히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기회가 생겨 다시 여기로 이사 왔어요. 아직 다 둘러보진 못했지만, 확실히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더라고요. "
나는 그저 ‘그렇구나’하고 맞장구쳐주고 있기 바빴다.
" 예전과 달라져서 그 애도 이미 이사 가고 진작 없어졌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찾고 싶어요. 어디에 있든 말이에요. "
얘기를 듣다 보니 남 얘기 같진 않았다. 나도 어릴 때 누군가와 멀어진다는 걸 잘 알고, 직접 경험해 본 적 있으니까.
" 그 애가 있어 당신은 어땠는데요? "
궁금해진 내가 질문을 하니 그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이내 나에게 할 답변이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 그 애는 ··· 저에게 있어 여러 감정을 알려준 친구예요. 수학 공식이나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던 저에게 감정이란 단어의 정의를 알려줬어요. 기쁨과 바람, 창피, 슬픔, 그리고 제일 많이 알려준 건 ‘사랑’. 사랑이었어요. "
‘우와, 그 친구는 누구길래 그런걸 가르쳐 주었을까.’ 하며 이야기를 계속 듣다가
" 그리고 그 친구가 너인 것 같아. 맞지, 백화초 4학년 3반 12번 류서현? "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놀라웠다. 내가 생각하던 그 애가 다름 아닌 지금 내 앞에 있는 ‘한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