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은 어딘가 비틀거린다. 벽에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나는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속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한때 나의 모든 것을 담아냈던 현실이, 그 모든 기억들이 이리도 쉽게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에 경악할 수밖에 없다.
" .. 이게, 사랑 따위에 굶주린 사람의 마지막이구나 " 그 말은 내가 마지막으로 뱉은 고백이었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한 채, 사랑을 갈구한 끝에 나는 그 단어로 내 인생을 마무리했다. 내가 사람들에게 보여준 모습은 거짓이었다. 그들 앞에선 언제나 상냥하고 온화한 척, 그러나 내면은 고통스러웠다. 외면의 온기와 달리, 내 마음은 날마다 차가워졌고, 결국에는 그 고독이 나를 삼켜버렸다.
그토록 원했던 사랑을 손에 넣지 못한 채, 내 삶은 끝났다.
차갑고, 고요한 곳에서 눈을 떴을 때, 나는 알았다. 이곳은 죽음 후의 세계라는 걸. 그리고 곧이어, 내가 눈을 떠본 곳은 다른 차원의 공간, 내가 익숙한 세계는 아니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손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감각이 없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내 몸 안에서 비정상적인 힘이 흐르며, 그 힘이 갑자기 내 심장을 움켜잡은 듯이 조여왔다.
“어... 여긴…”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내가 아는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갑자기 느껴지는 익숙한 느낌, 내 몸에 흐르는 기운이 다르다. 그리고, 눈앞에 떠오르는 이름.
‘ 엘리시아 드 로셰르 '
그 이름을 나는 분명히 알았다. 소설 속에서 읽었던, 내가 애써 피해버린 그 인물. 악녀, 그리고 고통받던 여주인공이었던 그녀. 눈에 띄게 치명적인 악녀였지만, 사실은 그저 남들로부터 이용당한 인물이었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
그녀가 내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그 순간, 내게는 단 하나의 생각만 남았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죽을 바엔, 내가 살겠다."
살아나기 위해서는 이 악녀의 삶을 바꿔야 했다. 하지만, 이 악녀로서의 삶은 너무나 끔찍했다. 그 끝은 내가 피할 수 없었던 죽음, 하지만, 나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