赤月 X 白鳥
- 정신 똑바로 차려.
- 백조 白鳥 를 살리지 못하면
- 너나 나나 다 개죽음이야.
붉은 달이 사방을 휘감았고 그 빛과 비례하는 역한 내가 근처에서 진동했다. 귀에 들리는 건 시끄러운 무전과 자신의 구두 소리. 다급한 내용과는 다르게 적월 赤月 은 한껏 여유를 부리며 넓고 긴 복도를 나아갔다. 건물 안이 모두 암전이라 창밖의 붉은 빛이 더 잘 새어 들어오는 듯했다. 중간중간 차갑게 식은 시체에게 눈길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혈 無血 미친 새끼들이 피 안 흘린다며. 자기들이 안 흘린다는 뜻인 줄 누가 알았겠냐고. 하여간 쟤네가 엮이면 일이 피곤해진다. 그나마 백조 白鳥 가 잘 숨어서 망정이지. 조만간 한번 만나야 한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런 식일 줄은 몰랐네. 얼마나 잘났으면 백 白 자를 처박았을지 한번 보자고.
고고하신 백조 白鳥 님은 소문 그대로였다.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날개가 다 찢겨있었다.
더러운 순애
허락받지 못한 빛을 탐한 자여
해문 海紋 그룹은 예로부터 서극 序劇 과 인연이 질겼다. 백조 白鳥 의 증조의 증조인가? 걔도 우리가 구했다고. 그 대에서 뒤졌으면 쟤네는 이미 폭삭 망했다. 무혈 無血 새끼들 정부랑 판 짜고 치는 거 모르는 사람이 있나. 밀수 단위 바뀔 때부터 정부가 손쓸 줄 알았다. 우리가 백조 白鳥 할아범한테 그렇게 말을 했는데 결국 다 처 죽어야 깨닫는 구나. 지금까지 잘하다가 그 늙은이가 노망이 난 건지 죽을 때 돼서 돈에 미친 건지. 미칠 거면 곱게 미치지 판이 꼭 커져야 정신을 차려요.
제 혼자 헬기 타고 튄 거 보면 흉인도 저런 흉인이 없다. 손주 다 죽어가는데. 애초에 데리고 튀든가 조심을 좀 하든가. 그러면 내가 이 고생을 할 일이 없잖냐. 씨발 내 팔자야. 적야 赤夜 가 백조 白鳥 도 만만찮게 정신병자라던데. 백 白 자 가문은 대대로 정신병 물려주나. 착하다 못해 지루한 적야 赤夜 가 저런 소리를 할 정도면 얼마나 병신인지. 벌써 그 애새끼를 마주할 생각에 관자놀이가 아린다.
서극 序劇 은 명문이다. 연을 이은 그룹만 해도 줄줄 이으면 날을 샐 정도고 내부 임원들은 철저히 죽음의 연으로 이루어졌기에 지난 50년간 내부 기밀이 누설된 적이 없다. 정부와 오래전부터 척을 진 탓에 거처를 옮기는 일은 다반사였지만 단 한 번도 융통성 있게 빠져나가지 못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 서극 序劇 의 중심에는 백 白 자 조직원이 있었다. 적월 赤月 따위는 감히 넘볼 수도 없는 혈연으로 이루어진 저치들이었으니.
지금 적월 赤月 이 모시러 가는 백조 白鳥 역시 백 白 자 식구였다. 해문 海紋 그룹도 문제가 많았다. 차기 회장이란 사람이 아들 하나를 제대로 못 낳고 죽었으니. 서극 序劇 에서 손을 쓸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얼마나 해문 海紋 을 아꼈는지 감이 오는가. 그 까탈스러운 백 白 자 작자들이 자기 아들을 보냈다. 백조 白鳥 에게도 그 편이 나았을 것이다. 평생을 손에 피 안 묻히고 살아갈 기회였는데. 안타깝게도 다시 그의 피가 연결된 조직, 서극 序劇 으로 복귀해야 한다.
그 밤이 처음이었다. 백조 白鳥 와 마주한 게. 이제 막 18살이라 하니 어리긴 더럽게 어리네. 말이나 잘 들으면 다행이네. 뭐 이런 부류의 생각을 하며 지시받는 방으로 향했다. 딱 봐도 회장이 앉아 있었던 방이 복도 끝에 보였다. 보통 이런 구조인가? 아닐 텐데. 커다란 문 옆에는 무혈 無血 의 손길이 느껴지는 시체가 다섯 구 정도 놓여있었다. 완전 전멸이네. 이제 우리나라 약쟁이들은 뭐 처먹고 살지. 아무리 쉬쉬해도 해문 海紋 이 전국 암시장들 다 움직이고 있었을 텐데.
낡은 소리와 함께 푸른 색 대문이 열렸다. 그 속에도 역시나 혈향. 지독하다, 지독해. 허벅지에 꽂힌 칼집에서 작은 단도를 꺼냈다. 검은 장갑을 찬 손으로 단도를 들고 반대 손으로 문을 마저 밀었다. 그 손에는 얇은 은색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적야 赤夜 의 손에도 같은 반지가 있겠지. 하지만 같은 쪽 손은 아닐 것이다. 적야 赤夜 는 얼마 전 오른팔을 잃었으니까. 방 안은 시체가 쌓여 있었고 그 사이에서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여기 중 하나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 순간 적월 赤月 은 마주했다.
그녀는 영원히 탐할 수 없는
희고 찬란한 빛을.
백조 白鳥 는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작고 왜소했다. 책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오밀조밀한 외모는 둘째치고, 연갈색 머리카락이나 니트 같은 것들은 정말 자신과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으니. 그 순간을 공명이라 하던가. 방금까지도 덜덜 떨었으면서 존나 늦었다고 성질 부리는 게 딱 정신병자긴 했다. 태도와 다르게 환하게 웃고 있지 않았더라면 적월 赤月 은 그를 사춘기 소년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서극 序劇 에서 금한 것은 3가지 있다.
기밀 누설과 지령 이외의 행동
그리고
사랑
적월 赤月 은 서극 序劇 에 누구보다 오래도록 몸을 담근 사람이었고 저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10년 가까이 어긴 적도, 어길 생각도 없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말은 이유가 있는 법이니깐.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피해 볼 일도 없고 조금이나마 편하게 깔아지려면 깨끗한 조직 생활은 필수 품목이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왜 이제 와서 반감이 드는 건지.
백조 白鳥 의 눈앞이 붉었다. 주변에 피가 가득해서 그런가, 아니면 제 눈앞으로 피가 흐르고 있을지도. 그렇게 착각할 정도로 주변은 혼란스러웠고 백조 白鳥 는 조금 죽고 싶었다. 정 붙인 적 없는 그룹이고 기업이라 내부인이 죽든 말든 알 바는 아녔지만 내가 죽을 수도 있다면 말이 달라지지 않는가. 그래도 내가 서극 序劇 에서 지원한 최고 인력이고 내 위에 있는 또래는 찾기도 힘든데 자기 살겠다고 날 버려? 제 복을 버린 거지.
10살에 해문 海紋 으로 와서 누릴 호사 다 누린 건 맞다. 아마 성인이 되면 난 백 白 자 이름을 버리고 해문 海紋 의 사람이 되었겠지. 솔직히 그게 더 편한데. 서극 序劇 에서 하는 일은 항상 나와 맞지 않았다. 너무 공격적이고 어찌 보면 더러운 일인데. 사람 죽이는 것보단 마약팔이가 더 적성에 맞지 않겠어?
총이 중앙을 뚫은 시계는 멈춘 지 오래고, 그 속에 얼마나 숨어있었는 지 모를 일이다. 내 숨소리 이외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서극 序劇 과 연락이 닿았다.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안도가 되어 손이 덜덜 떨렸다. 지원을 보낸다고?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연락이 다시 끊겼다. 적야 赤夜 가 오려나? 걘 좀 불편한데. 최근에 다쳤다는 소식이 들린 것 같기도 하고.
†††
백조 白鳥 는 원래 서극 序劇 을 좋아하지 않았다. 짙은 혐오에 가까우려나. 10살에 그곳을 떠난 이후 다시 그들을 만난 건 16살에 열린 연회에서 였다. 어린 시절에는 느낄 수 없었던 혈향이나 쇳내가 적 赤 이나 흑 黑 자 조직원들 사이에서 강하게 느껴졌다. 나중에는 연회장 특유의 달큰한 내음이 사라질 정도로 쾌쾌한 죽음의 냄새가.
그리고 적야 赤夜 와 적화 赤花 도 있었다.
서극 序劇 는 계급과 포지션에 따라 코드네임이 지정된다. 실행 계열, 즉 직접 칼을 드는 건 적 赤 자와 흑 黑 자의 역할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강도 높은 훈련으로 양산되는 흑 黑 자와는 달리 적 赤 자는 철저히 능력치 하나로 지정되는 계급이기에 서극 序劇 내부에도 흑 黑 자에 비해 수가 현저히 떨어진다. 그리고 정보 계열의 청 靑 자. 그리고 운영 계열이자 상위 계층인 백 白 자가 존재한다. 이것도 어찌 보면 운명인가.
그날 만난 적야 赤夜 는 지적인 모습이 눈에 밟혔다. 청 靑 자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격식을 차리는 모습이 백조 白鳥 는 다소 불편했다. 그 형 몸에서 나는 혈향이 싫었다. 은연중에 까칠하게 굴었을까. 형 표정이 티 나게 굳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단발의 여자가 누군가와 계속 연락하고 있었다. 적화 赤花 였다. 코드네임이 꽃이라 누군지 궁금했는데, 역시 쇳내. 16살의 백조 白鳥 는 그곳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대화 끝에 그 자리를 벗어나 들은 건,
- 백조 白鳥 님 앞에서 적월 赤月 찾지 마.
- 아직은 우리 윗자리야.
- 백연 白緣 님이 쟤 버렸다고 했어.
- 그래도 혹시 몰라.
- 아직은 쟤가 우리 주인인 거 명심해.
맞다. 적월 赤月 이란 이름도 들었지. 적 赤 자는 백 白 자의 짐승이다. 서극 序劇 이 예전부터 이어온 진리. 혈연을 이은 백 白 자가 진짜 서극 序劇 이고 동시에 그들의 주인이었다. 개새끼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물라면 물고, 죽으라면 죽고. 백조 白鳥 는 사실 피 냄새가 가득 배어있는 저들보다 자신을 버린 백 白 자 조직원들이 더 싫었을지도 모른다.
†††
백조 白鳥 가 숨어있던 방의 커다란 문이 열릴 때 백조는 생각했다. 누구려나. 적야 赤夜 가 다쳤다면 적화 赤花 려나. 누구든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인간이었다. 특히 적야 赤夜 는 더. 그리고선 들린 게 하이힐 소리였다. 어떤 미친년이 작전에 힐을 신고 다니나 했는데 어렴풋이 그런 새끼가 적 赤 자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둘이 아니라면 그 나이대 적 赤 자는 한 명 뿐이다.
적월 赤月
암전 사이로 사람의 형상이 보이고 가까워지니 여자의 몸이 보였다. 벽에 기대앉은 백조 白鳥 를 향해 허리를 숙이자 익숙하지 않은 냄새가 났다. 피 냄새도, 쇳내도 나지 않았다. 진한 향수가 백조 白鳥 의 코 끝을 가득 적셨다. 옆으로 붉은 색이 내렸다. 피가 아니라 머리카락. 붉은 와인색 머리카락이 백조의 시야를 가렸고 얼핏 보인 여자의 손에는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적월 赤月 이 내민 손을
백조 白鳥 는 잡지 않을 수
없었기에.
피투성이 손을 잡았지만
백조 白鳥 는 그날 이후 다시는
더러운 그녀에게 구원받고 싶지 않았다.
공명 逢明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빛을 마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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