猶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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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4 23:53조회 124댓글 2소야

원숭이 유




임유화는 본래 의심 같은 게 많았다. 보통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 같은 건 버리라고들 하지만 임유화는 그걸 넘어서서 아는 사람이 주는 음식까지도 두세 번 확인하고 먹었다. 엄마. 여기 독 든 거 아니지? 임유화는 여섯 살에 독약 먹어 죽는 조선시대 드라마 보곤 엄마한테 그렇게 물었다. 그 이후로 임유화는 의심병이라도 돋은 건지 모든 음식에 기미를 원했다. 뭘 먹을 때에도 다른 사람부터 먹인 다음에 먹었다. 혹여 썩진 않았는지 맛이 없진 않을지 그런 것들을 확인하려던 의도였지만 예의있는 행동이라고 칭찬도 몇 번 받았다. 임유화는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 밝혀진 ‘곧 빙하기가 찾아온다’는 연구 결과도 믿지 못해 임유화는 악착같이 공부했다. 빙하기는 오 년 뒤. 임유화가 지금 열여덟이니까 스물세 살에. 세상이 곧 망한다니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도 없었고, 임유화는 어느 정도 공부 머리도 있어 비교적 쉽게 한국 제일 가는 대학교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학과는 고민도 안 하고 물리천문. 학교 가서 천체 관련으로 저명한 교수에게 정확한 설명 듣고 나서야 임유화는 빙하기가 찾아옴을 인정했다. 그게 빙하기 삼 년 전. 임유화는 스무 살.


그 무렵 임유화는 팀플 미션을 받았다. 세상이 망하기 삼 년 전이라는데 웬 팀플이라지만 멸망 하루 전에도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사람이 있는 판에 대학 다닌다는 사람이 없을 리가 없었다. 임유화는 그 중에서도 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이었다. 빙하기가 찾아와도 곧바로 죽진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여간 팀플 미션은 두 명이서 짝 지어서 하는 거라 팀플이라기보단 듀오에 가까웠다. 임유화는 특유의 까탈스러운 성격이나 공부나 하는 이미지 때문에 친구가 한 명도(정말 한 명도) 없었는데, 그런 임유화에게도 같이 팀 하자고 다가오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조용한 남자애가 푸짐한 몸 끌고 임유화에게 다가왔다. 와중에 얼굴은 작아서 커다란 안경이 얼굴을 다 덮었다. 저게 도수가 도대체 얼마야. 임유화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자를 흘겨봤다. 아, 자세히 보니 알 것도 같다. 학과 수석 백예성이다. 백예성은 눈을 지나치게 자주 깜빡였다. 임유화한테 뭔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제 앞에서 쭈뼛대는 백예성이 임유화는 죽도록 답답했다.


- 뭐? 어쩌라고.
- 아니, 아, 팀.
- 팀플? 말 좀 제대로 해라. 니 과탑 백예성 맞지?
- 어, 어.
- 어는 한 번만 하고.
- 어, 어...
- 아오.


얘랑 팀 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다. 임유화는 다른 사람을 찾으려고 둘러봤는데 전부 다 이미 두 명씩 짝지어서 강의실을 나가고 있었다. 임유화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백예성 어깨를 두드렸다. 어깨는 꽤 단단했다. 전부 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근육이다.


- 그래. 팀 하자.


잠수라도 타면 백예성이 어떻게든 해 주겠지 같은 쓰레기 마인드는 임유화도 싫었다. 팀플은 속사포로 진행됐다. 천문 관측이 필요한 때도 있었는데 카메라 세팅이나 셔터 개방 같은 힘든 일은 백예성이 다 해 줬다. 힘은 웬만한 남자보다 센 주제에 말만 걸면 허둥대는 게 웃겨서 임유화는 일부러 몇 번 놀려줬다. 이 새끼가 얼마나 용기가 있어서 독을 탔겠나 싶어서 마이쮸 같은 걸 줘도 그냥 먹었다. 얘가 독 탈 정도로 시달린 거면 솔직히 독 탄 거 알아도 그냥 먹어줘야 한다.


성깔 더러워서 친구도 없고 가족들끼리랑도 서먹한 임유화는 이 때를 꽤 행복하게 기억했던 것 같다. 안 그랬으면 지금 이 상황에서 백예성이 제일 먼저 떠오를 리가 없다.


[ 임유화 님은 A그룹으로 배정되셨습니다 ]


세상이 A와 B그룹으로 나뉘었다. 그건 정확히 일월 일일, 임유화가 한국 나이로 딱 스물셋 되던 때였다. A그룹은 명색만 A지 실제로는 생존자 그룹으로 불렸다. 마찬가지로 B는 유예자 그룹이라 불렸다. 그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전 세계 인구의 10% 미만으로 추정되는 생존자 그룹은 무려 빙하기의 진행 기간인 ‘1억 년’을 버틸 수 있는 동면기의 사용권이 주어진다. 각국 정부는 거대한 평야에 지하를 뚫고 생존자 그룹을 위한 벙커와 동면기를 제작한다. 자원을 아끼지 않는다. 예산과 미래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일억 년 지나면 다 사라질 자원이었다.


유예자 그룹은 동면기 사용이 유예된다. 얼마나 유예되는지는 모른다. 기회가 안 온다는 말은 죽어도 하기 싫어서 일단 유예라고 둘러댄다. 나중에 더 생산되는 만큼 기회가 생긴다는 뜻인데, 중요한 사람들은 다 생존자 그룹으로 불려가 동면기 공장 가동할 인력도 없어 실상은 기회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임유화가 A그룹에 배정된 이유는 ‘국내 최고 대학 재학생 중 성적 우수자’였지만 실제로는 임유화의 부모님이 정부에 돈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아마 몇십억 쯤은 우습게 찔렀곘지. 그리고 돈의 압력은 대단했다.


그러니까, 임유화는 의심이 많았다. 그 비상한 머리로 빙하기가 찾아와도 바로 죽진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안다. 반면에 동면기는 1억 년 동안 안전할 거라는 확신이 부족했다. 1억 년이면 얼마나 천문학적인 기간인가, 만약 기적적으로 동면기가 전부 오작동이 없었다고 해도 인류가 그 넓은 시간의 공백을 뚫고 다시 지구 위에 군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역시 없었다.


- 아니, 전 동면을 원치 않는다니까요?
- 고객님, 그 부분은 선택사항이 아니라서...
- 아 됐어요.


임유화는 전화를 거칠게 끊곤 휴대폰을 바라봤다. 백예성에게 보낸 연락에는 아직도 1표시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쟤는 뭘 하길래 이렇게 바빠. 팀플 땐 매일 보내자마자 읽었던 주제에. 임유화는 백예성이 동면을 간절히 원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왜냐하면 걔는 겁이 많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천문 관측할 때에도 물건 떨어지는 소리에 몸을 움찔댔었다. 한 번은 왜 근육을 키운 거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백예성은 혹시 깡패가 자길 막 때리거나 같은 반 양아치들에게 맞을까 봐 그게 무서워서 운동을 시작했다고 했다. 하여간 시비는 안 털리게 생기긴 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임유화가 휴대폰을 잽싸게 집어들었다.


- 너 A그룹이냐?


임유화가 보낸 연락에 1이 사라져 있었다.


- 아니...


백예성 말투는 카톡에서도 찌질했다. 과탑인 애도 유예자인데 임유화가 생존자 라인인 걸 보면 아마 빙하기가 찾아와도 비리는 팽배할 것 같다.


- 야 나 A거든
- 나랑 그룹 바꿀래?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 왜?


그리고 이게 백예성의 첫 마디.


- 뭐가 왜야?
- 그룹을 왜 바꿔줘?
- 그러면 안 돼?
- 당연히 안 되지!


백예성이 흥분해서 소리치자 휴대폰 음질이 깨졌다. 아야. 귀야. 조용히 좀 하지.


- 미안... 시끄러웠지.
- 됐어.
- 아무튼, 당연히 안 돼. 시중에 나온 동면기 한 개가 얼마에 거래되는지 알아?
- 얼만데?
- 이백 억.


아무리 임유화라 해도 수중에 이백억은 없었다.


- 비싸네.
- 당연히 비싸지. 그걸 왜 넘겨? 너 바보야?
- 난 동면기 별로 안 쓰고 싶어. 너도 알잖아. 유예된다고 바로 죽냐? 빙하기가 그렇게 무서워?
- 그래도... 영하 몇십 도가 넘는 세계에서 살아가야 되잖아.
- 어쩌라고? 그게 힘들면 진작 죽었지.


그리고 백예성은 음소거 버튼을 잘못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조용했다.


- 자냐?
- 아니, 그렇다고 해도... 진짜? 나한테 양도할거야?


백예성은 임유화가 처음 보는 사람한테 먹을 거 받을 때처럼 행동했다. 임유화는 본인이 남한테 저렇게 찌질하게 보였을까 진심으로 걱정했다.


- 근데 그거 법적으로 문제 생길 수도 있지 않아? 아니, 그게 가능하긴 해?
- 그건 지금부터 생각하자!


전 세계의 단체 동면 기간은 대부분 한 날짜로 통일되었다. 그게 올해 삼월 일일이었다. 방금 전 상담원이 말했던 것처럼 속한 그룹을 바꾸는 건 자율이 아니었다. 한 번 정해지면 무를 수 없는 것들. 정부의 눈을 피해서 정교하고 감쪽같이 명단을 바꿔 놓는 것은 일개 대학생 두 명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 ...한번 생각해볼게.
- 시간 있어? 그럼 만나서 얘기 좀 할래?
- 그래. 종이랑 펜 가져올게. 계획은 짜면 좋을 것 같긴 하다.


그리하여 임유화와 백예성은 그 다음 날 학교 앞 카페에서 만나게 된다. 임유화는 왠지 백예성을 만날 때마다 백예성 덩치가 커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원래도 저렇게 컸나. 걸어오는 백예성은 임유화보다 10cm는 더 커 보였다. 참고로 임유화는 177cm다.


- 내가 생각해봤거든.


오자마자 본론부터 말하는 것도 저번 팀플 때랑 달라진 게 없다.


- 명단을 바꾸는 것 자체는 불가능해.
- 그럼?
- 담당자가 나를 너로 보면 전부 해결되는 문제야.


백예성이 커피 두 잔 담긴 쟁반을 탁자 위에 올려놓곤 자리에 앉았다. 임유화는 목이 말라서 커피 하나를 잽싸게 들어 마셨다.


- 너를 나로? 그게 뭔 소리야?
- 그러니까, 동면기에 들어갈 때 신원 확인을 할 거 아니야.
- 그치.
- 그때 내가 너인 척만 잘 하면 넘어갈 수 있는 문제지.


정부랑 싸울 준비만 하고 있던 임유화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렇게 쉬운 문제였구나.


- 그래서 내가 집에서 너 목소리를 따라해봤거든.


백예성이 그렇게 말하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어제 전화가 녹음이 되고 있었는지 통화 내용 녹음본이 있었다. 백예성은 그걸 한 번 듣더니 목을 가다듬었다. 지금 뭘 하려고 하는 거야. 잠시만.


- 아. 아아. 어때? 여자 목소리 같아?


쉬운 문제였다는 말은 취소한다. 백예성은 타고난 저음이었다. 정정하기도 성가셔 한껏 여자 목소리 내고 있는 백예성 폰을 뻇어 동영상을 찍었다. 백예성은 자기가 찍히는 줄도 모르고 커피나 쪼록거리면서 여자 목소리 연습을 하고 있었다. 다시 폰을 건네주니 뻇어간 줄도 몰랐다는 듯 놀라는 백예성. 내가 어쩌자고 얘한테 이런 제안을 했을까. 백예성은 영상을 보더니 여자 목소리 내는 거지 같은 행동을 싹 관뒀다.


- 헬륨 가스를 구하자.


백예성이 기어가는듯한 저음으로 대답했다.


- 그래.
- 근데 중대한 문제가 하나 더 있어, 예성아.
- 뭔데?
- 니 몸.


백예성 몸이 코끼리만큼 거대했다. 백예성이 근육덩어리 팔로 조신한 자세를 취했다.


- 여자가 177이나 187이나 커 보이는 건 똑같은데 여자가 너 같은 근육돼지면 엄청 의심받을 거 같은데.
- 내, 내가 살을 한번 빼 볼게.
- 닌 살이 아니라 근육이라니까?
- 그럼 두 달동안 누워있기만 할게.
- 그거지.


임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유성은 바보처럼 임유화를 따라했다.


- 한 벙커에 들어가는 사람이 몇천 명이 넘는대. 그거 다 자세히 확인하긴 힘들 거야. 조심할게.


어쨰 팀플을 다시 하는 것 같았다. 백예성과 임유화는 그 이후로 가발 정보랑 헬륨가스 정보만 찾았다. 세상이 곧 망한다니 배달 되는 제품을 찾기까지만 한 세월이 걸렸다. 천문학적인 가격이었지만 그 정도는 임유화가 부담할 수 있었다.


임유화는 그냥 이 상황이 웃겼다. 빙하기가 고작 몇 개월 남았는데 저 거대한 돼지를 앞에 세워 놓고 여장시킬 계획이나 진지하게 세우고 있다니. 임유화가 웃자 백예성은 눈치만 주고 뭐라 하진 못했다. 아마 제정신 아닌 임유화를 무서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저 근육 둬서 뭐하냐, 진짜. 저걸 한 번도 못 써먹고 버릴 생각 하려니 그건 좀 아쉽기도 했다.


그새 커피를 다 마셨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그제야 임유화는 백예성이 준 커피를 아무 걱정도 없이 마시고 있었다는 사실을 꺠달았다.












미리 예




백예성은 본래 겁 같은 게 많았다. 한 번은 어릴 떄 아동용 귀신 애니를 보고 몇날을 울면서 밤 새운 적도 있었다. 그 이후로 백예성은 티비 금지령을 당했다. 할 수 있는 게 공부밖에 없어서 공부라도 했더니 세상이 망한댄다. 그 소식을 들었을 떄에도 백예성은 몇날을 울면서 밤 새웠다. 세상 망한다는 말이 귀신 애니보다 몇백 배는 더 무서웠다. 그래서 살 방법을 궁리했다. 지금 당장 돈을 미친 듯이 버는 건 불가능, 국가가 감동할 정도의 공을 세우는 것도 불가능, 그렇다면 공부를 하자. 한국대에 들어가서 국가에 유용한 인재가 되자.


그래서 공부했고 목표대로 한국대 물리천문학과에 들어갔다. 과탑도 했다. 그럼에도 생존자 그룹에 들어가긴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생각이 현실이 되는 걸 바라보는 건 생각보다 속상한 일이었다.


백예성은 또 울다가 잠에 들었다.


저녁 즈음이나 되었을까, 겨우 잠에서 깬 백예성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연락 올 곳이 없는데 연락이 와 있었다. 카톡 창에 찍힌 이름을 본 백예성이 몸을 흠칫 떨었다. 학과에서 제일 무서운 애가 연락을 한 것이었다.


백예성은 한참 동안을 고민하다 답했다. 세상이 망했으니 사람 한 명 죽여보자, 너 피해자가 될 생각 없니, 이런 협박을 받는 상상까지 했는데 예상 외로 백예성에게 득이 될만한 연락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무작정 사람을 믿는 건 좋지 않다. 동면기에 들어갈 생각에 잔뜩 기대하면서 여자 목소리 연습을 한 건 사실이지만 백예성은 사람을 쉽게 믿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특히 그런 무서운 여자에게 시달리는 건 질색이다. 팀플 때 시달렸던 기억만 떠올리면 아직도 악몽을 꾼다. 백예성은 카페 약속이 잡힌 날 거울 앞에서 최대한 표독스러운 표정을 연습했다. 만만해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카페에서 본 임유화는 생각보다 착한 인상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저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백예성은 안심하여 준비해온 말을 천천히 뱉었다.


열심히 준비했던 여자 목소리가 수포로 돌아간 것을 빼면 모든 것이 수월했다. 백예성은 이상할 정도로 수월하게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게 거북했다. 내가 잘하면 모든 게 잘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고 인터넷으로 헬륨 가스 제품을 찾았지만 대부분은 품절에 배송 불가, 겨우 배송 되는 제품을 찾으면 가격이 몇백을 넘어가는 경우가 잦았다.


- 찾았어?
- 몇 개 보이긴 하는데, 이건 칠백만 원... 이건 천만 원이 넘어.
- 제일 좋은 걸로 골라, 그럼.
- 고르라고?


임유화는 무슨 동네 마실 나가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 그 정도면 내가 살게.
- 아니, 팔백이라니까?
- 차피 세상도 망하는데 미리 쓰지 뭐.
- 너 돈 많아?
- 카페 너가 샀잖아.


백예성이 카페 영수증을 확인했다. 아메리카노 두 잔에 십일만 원. 인플레이션에 치가 떨리긴 했으나 팔백은 십일만 원보다 무려 팔십 배나 비쌌다. 백예성은 합리적인 의문을 떠올렸다.


이건 전적으로 백예성에게 유리한 거래였다.


백예성 말마따나 동면기를 원하는 사람은 수두룩하니 임유화와 닮은 사람을 한명 골라서 바꿔치기하면 임유화도 편하고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임유화는 백예성을 선택했다. 심지어는 제게 필요한 물건들도 사 주겠다고 한다. 백예성은 혼란스러웠다. 이유가 뭐지? 나한테 왜 이렇게 잘 해주는 거지?


백예성은 계산 같은 것에 철저했다. 백예성이 어릴 때 주식 투자 실패로 빚덩이에 내려앉은 백예성의 부모는 모든 것을 수치화하기 시작했다. 백예성은 그 아래에서 자랐고 당년하게 손익을 구분하는 능력을 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람을 이용하기 시작했고 사람에게 이용당하기 시작했다.


이년전 팀플 조를 짤 때 임유화에게 다가갔던 것도 철저한 계선에 의해서였다. 임유화는 공부를 꽤 하니 조원으로 도움이 되겠고, 친구도 없는 것 같으니 함께 하자고 제안하면 거절 못 할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그래서 백예성에게 임유화는 익숙하지 않은 종류의 사람이었다.


임유화는 백예성을 이용하지 않는다.


그건 꽤 무서운 사실이었다.


사람을 믿는다는 건 겁이 나는 일이니까.











猶豫
유예



백예성은 유예자였다. 생존자가 되고 싶어하는 유예자. 백예성이 만발의 준비를 끝내고 헬륨 가스를 들이켰다. 목소리를 내니 꽤 여자처럼 들렸다. 어째 유화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다시 목소리를 내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백예성은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가발을 다시한 번 세팅한 뒤 모이기로 예정된 벙커로 걸어갔다.


임유화는 벙커 앞에 서서 백예성을 기다렸다. 1차 신분 확인은 방금 끝난 차였다. 사람은 발에 채이도록 많았고, 신분을 확인하는 사람은 고작 세 명 뿐이었다. 확인도 ‘임유화 씨 맞죠?’ ‘네 맞습니다’ 만 듣고 끝냈다. 백예성을 걱정할 일은 없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예성과 임유화가 마주쳤다. 임유화는 부쩍 근육이 빠져 태가 드러난 백예성을 보고 자지러지듯이 웃었다. 문제가 있다면 어깨가 너무 넓다는 것 정도였는데 오버핏 후드티를 입어서 그리 티가 나진 않았다. 백예성은 눈이 안 보여서 미간을 찌푸리고 다녔다. 그럼에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고생해야 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임유화만은 잘 보였다. 저 멀리 있는데도 뒤에 후광이 보이는 것처럼 밝았다.


임유화는 백예성을 보고 솔직히 좀 놀랐다. 빌어먹을 안경이 이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근육 빠진 백예성은 보기 좋은 탄탄한 몸이었고, 안경까지 벗으니 여장만 안 했다면 지금쯤 번호 다섯 번쯤 따였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일억 년 뒤에는 아마 엄청난 알파메일로 커 있을 것이다.


그때 책임자가 생존자들은 벙커 안으로 들어오라며 소리쳤다. 백예성은 허겁지겁 생존자 라인에 껴 들어갔다.


- 백예성 잘 가!


어쩌면 마지막 인사가 될 한 마디.


백예성은 왠지 마음이 심란해서 임유화를 돌아봤다.


대답을 하려고 했는데 목이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임유화 입에서 입김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슬슬 빙하기가 오려나 보다. 과학자들 머리는 역시 누구도 못 따라간다. 예측이 소름 돋게 정확했다.


생존자가 사라진 거리는 사람이 없었다. 벙커 입구만 없었다면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조차 없었다. 제 바닥에는 커다란 벙커와 동면기가 있겠지. 임유화는 기회를 괜히 넘겨줬나 아주 잠깐 고민했다. 그럼에도 죽기 전에 백예성 여장 보고 실컷 웃어줘서 그건 다행인 것 같다.


행복이 사라진 거리에는 불행만이 남았다.


그리고 불행과 함꼐 빙하기가 찾아올 것을 알았기에 그 누구도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우박이 떨어진 건 그 순간이었다.


아. 아마도 백예성은 지금쯤 동면기에 들어가고 있을 테지.


지금쯤 밖엔 눈 같은 게 떨어지고 있으려나.


아침에 봤던 일기예보에는 90%확률로 눈이 온다는 소식이 있었다. 임유화가 눈을 제대로 피해야 할 텐데. 생존자 라인을 따라가며 백예성이 생각했다.


백예성의 어릴 적 별명은 코끼리였다. 그때는 운동같은 거 하지 않았다. 백예성은 뚱뚱했고, 공부도 잘하지 않았고, 부모님은 맞벌이에 집안 사정도 좋지 않아 매일 씻어야 되는 줄도 몰랐다. 냄새 나는 코끼리. 매일 급식을 하늘만큼 받아서 먹는 코끼리. 우둔한 코끼리. 겁쟁이 코끼리. 별명도 참 많았다.


가발 쓰고 벙커에 들어와 동면기로 걸어가는 백예성은 어릴 적 별명들을 떠올렸다.


그 별명들은 실제로 대부분 맞았다. 백예성은 더러웠고 뚱뚱했고 겁쟁이었다. 그렇게 놀림받아도 한 번 대꾸한 적 없는 멍청이였다.


백예성은 다시한번 깨닫는다.


겁 많은 코끼리.


자기가 제일 중요한 코끼리.


아픈 걸 제일 싫어하는 코끼리.






백예성은 말 못하는 바보 코끼리나 다름 없었다. 잘 다녀오라며 인사해준 임유화에게 잘 다녀오겠다는 대답 한 마디 못했던 게 계속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이제서야 자길 놀리던 초등학교 친구들에게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어서였을까.





백예성이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기계처럼 동면기에 몸을 뉘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백예성은 달리기 시작한다.









사랑은 배워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깊게 믿어본 적도 없었다.




사람이 무서웠다. 항상 도망치고 싶은 것들 투성이었다.






세상은 무섭고 매일 표정을 바꿔서. 백예성은 도저히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항상 겁에 질려 있었다.





근데 왠지, 이제야 뭔가 알 것 같은 기분.






안전을 뿌리치고 자신을 내던지고 달렸다.





벌써 빙하기가 찾아왔는지 하늘에서 우박이 우수수 쏟아졌다.










저 앞에 백예성의 심장이 있었다.










동면기를 앞에 둔 순간,



백예성은 자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다.










그건 세상이 멸망해도 나보다 우리가 더 중요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https://curious.quizby.me/Soyy…
PS. 유예(猶豫)라는 단어는 중국 선진시대에 기록된 동양 최초의 신화집인 ‘산해경’에 기록된 환상종, 의심이 많아 조심스러운 원숭이(猶)와 겁이 많은 코끼리(豫(나 여와 코끼리 상 자를 합친 한자))에 빗대어 생겼다. 따라서 ‘일을 결행하는 데 날짜나 시간을 미룬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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