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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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9 21:08조회 58댓글 0천진
소년의 카메라가 고장 나버린 것은 칠월 도입쯤의 얘기다. E의 할아버지 세대부터 제 기능을 해왔으니, 솔직히 그럴 만도 했다. 그럼에도 소년은 영 충격이 큰 모양이다. 수리점에도 몇 번이나 가봤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대로 올 여름방학이 폭싹 망해버리게 생겼다. 멍하니 마룻바닥에 누워 선풍기 바람을 맞다가도 소년은 한 번씩 절망 어린 한숨을 뱉는다.



우선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아주 먼 과거를 되짚어보아야 한다. 소년은 어릴 적 우주 어딘가 퍼런 별 위에 발을 붙이고 있었다. 허무의 우주를 벗 삼아 표류했다. 그렇게 여덟 살 무렵, 마주한 푸른 별이 지구였던 것이다. 소년은 무언가 고민할 새도 없이 파란 하늘 위로 발을 디뎠다. 말랑하고, 차가운 그리고 소다가 터져 올라오는 감각이 소년의 피부 위로 들러붙었다. 코로 들이쉬는 공기를 적응하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피부 위 덕지덕지 달라붙은 파랑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물결에 휩쓸려 헐떡이던 어린 소년을 구해준 것은 E, 통칭 여자애. 흰 E의 손이 소년의 뜨겁고 퍼런 손을 맞잡았다.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역시 지구와 우주는 자비가 없다. 바다에 빠트려 위험에 빠진 착각을 하게 하더니 그것은 이제 사랑에 빠지기를 독려했다. 지구에 뚝 떨어진 소년은 덜컥 겁이 났다. 지구는 아름답기만 한 별인 거군요! 어떡하죠, 사랑! 삼 년 가까이 중력이 그를 밑바닥으로 끌어당기는 상상을 했다. 저 깊은 심해에 처박혀 짓눌려 추해져 버린 해양생물로 눌어붙을 것만 같았다. 떨어지고, 가라앉고, 튀어 올랐다.

그날, 소년과 E는 모래 해변 위에 나뒹굴었다.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가슴팍과 내리쬐는 팔월의 태양은 불가피한 여름일 수밖에 없었다. E는 고개를 돌려 퍼런 별 소년을 바라보았다.

- 안녕.

그러니까 이것은, 소년과 E의 첫 만남 이야기. 소년이 끝없이 되새기는 여름의 한낮. 멍청하고 어리숙한 바닷물에 빠진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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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 잠에 들고 나면, 눈을 감았다 뜨면 소년이 사라져 있었던, 허황된 꿈을 꾸었다. E는 찝찝한 꿈에서 깨었다. 창밖은 아직 어스름한 새벽빛에 잠겨 있었다. 잠에 취한 정신으로 E는 마당에 발을 디딘다. 맨발에 달라붙는 흙이 축축하고 거칠다. E는 흐르는 땀을 무심코 손등으로 훔친다. 부는 여름 새벽바람이 서늘했지만 땀이 마를 수 없다. 남흑색의 하늘은 짙고 해가 뜨기까지는 멀었다. E는 평상에 누워 생각한다.

꿈은 대부분 반대입니다. 무의식이 만든 거짓 따위이니, 아무래도 좋습니다. 악몽이라고 하던가요. 그런 건 대개 피로하거나 수고했을 때 꾸는 일시적인 것이니 괜찮습니다. 해가 뜨면, 소년이 올 거예요. 그리고 바닷가에 갈 겁니다. 이맘때쯤이면 매번 같은 꿈을 꾸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보다시피 E는 지독한 자기 합리화의 달인이다. 새벽 세 시경 남중한 달이 외로이 떠 있다. 어두운 하늘과 파아란 달. 기이하고 아름다운 광경에 E는 잠시 소년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아름다워서. 그래. 그렇구나. E는 하늘로 손을 뻗어 두 갈래로 갈라진 손가락과 손가락을 맞댄다. 한쪽 눈을 찡그리고 달을 찍는 소년의 모습을 상상한다. E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리고 자각하지 못한 눈물이 흐른다. 그것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서둘러 몸을 일으킨다. 발바닥에는 여전히 흙이 묻어 있었지만, E는 개의치 않는다. 방금 생각한 것을 외면해야 한다. E는 그 하늘 아래에서 도망친다. 찝찝한 방 안에 누워 잠을 청하고 싶다. 잠을 청하고, 이 모든 걸 잊는다.



간밤에 모든 것이 거짓인 양 날이 밝았다. 동이 틀 무렵 소년은 모래사장에 앉아 수평선을 노려본다. 십 년 전 오늘, E와 자신이 나뒹굴었던 기억이 푸르게 바랬지만 선명했다. 여전히. 덥고 습한 전형적인 여름바람이 분다. 푸르거나 퍼런 것들이 반짝인다. 여기저기서 소다 거품이 뿜어져 나오고, 파도는 톡톡 터지길 반복한다. 허공에서 셔터를 누른다. 매미는 시끄럽게 우는데 바다가 고요하다.



7월 4일, 기록

카메라가 고장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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