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26 01:11•조회 69•댓글 3•ㅎ
여름이었다.
햇살은 너무 밝았고, 바람은 너무 무심했다. 나는 그 여름을 그렇게 막연하게 기억한다. 한낮의 열기 속에서, 그가 처음 나타났을 때도 나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처럼 그를 지나쳤다. 하지만 그 그림자는 곧 내 삶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
그의 이름은 민혁이었다. 말이 많지 않고, 언제나 눈빛으로만 나를 관찰하는 남자. 처음에는 그의 차가운 시선이 무서웠지만, 동시에 마음 한 켠이 이상하게 끌렸다. 그는 동네 근처 강가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곤 했고, 나는 우연히 그곳에서 그를 마주쳤다.
“여기서 혼자 있으면 위험하지 않아?”
낮게 뱉은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말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긴장은 내 마음을 긴장시키고, 동시에 안도하게 만들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 짧은 한마디가 내 여름을 바꿔놓을 거라는 사실을.
여름은 길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학교를 마치고 강가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숨이 막히도록 더웠다. 그러나 민혁이 있는 그곳만큼은 이상하게 시원했다. 물빛 위로 드리운 그의 그림자, 그리고 목소리에 실린 미묘한 걱정. 그것이 나를 안심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사고가 일어났다. 강가에서 발을 헛디뎌 물속으로 미끄러질 뻔한 순간, 민혁은 순식간에 내 손목을 붙잡았다. 차가운 물이 내 몸을 휘감았지만, 그의 손길은 따뜻하고 단단했다. 그의 품에 안긴 순간, 심장까지 전해지는 그의 체온이 내 몸을 감쌌다.
“괜찮아, 이제.”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눈을 마주한 채 깨달았다. 여름은 덥기만 한 계절이 아니라, 누군가 내 곁을 지켜주는 시간을 담은 계절이라는 것을.
그날 이후,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민혁은 여전히 말이 적었지만, 작은 관심과 행동으로 나를 지켜주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내가 무심코 떨어뜨린 책을 주워주거나, 강가에서 나를 기다리며 조용히 미소 짓는 그의 모습. 나는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랑이 항상 평온할 수는 없었다. 여름의 열기가 절정에 달한 날, 마을 근처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순식간에 불길이 번지고,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나는 그 안에 갇혀버린 아이처럼 떨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공기조차 무겁게 느껴졌다.
“여기 있어, 나만 믿어.”
민혁은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단순히 물속에서 나를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불길과 연기를 뚫고 나를 보호하며,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나는 알았다. 내 목숨뿐 아니라, 내 마음까지 그가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화재가 지나가고, 우리는 잿더미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날의 연기 냄새, 그의 머리카락에 묻은 재, 그리고 흠뻑 젖은 옷. 모든 것이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여름은 여전히 길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두려워하지 않았다. 민혁이 곁에 있었으니까. 그는 말없이 내 손을 잡고, 내 마음을 읽고, 내 세계를 지켜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긴 여름을 버텨냈다.
긴 여름이 끝날 무렵, 우리는 강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민혁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지만, 그 속에는 따뜻함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속으로 다짐했다. 앞으로 어떤 계절이 와도, 어떤 위험이 다가와도, 우리는 서로를 지킬 거라고.
그렇게, 너무 길게 느껴진 여름은 끝났지만, 나와 민혁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