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08 02:37•조회 48•댓글 2•오인
189X. XX. XX.
파도는 비릿한 숨을 몰아쉬며 흰 거품을 뱉어냈다. 인간들이 문명이라 부르는 고철과 증기의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바다는 여전히 수천 년 전과 다름없는 냉소적인 얼굴로 땅을 들이받고 있었다. 지안은 바위 틈에 몸을 뉘인 채 제 꼬리를 바라보았다. 달빛을 머금은 비늘은 아름다웠으나, 그것은 동시에 죽음을 부르는 낙인이기도 했다.
— 지안, 또 거기 있니.
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지안은 반사적으로 몸을 떨며 바다로 뛰어들려 했다. 하지만 이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고는 빳빳하게 세웠던 등지느러미를 뉘었다. 일호의 조부였다. 그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그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기운은 결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 삼촌.
— 뭍으로 나오거라. 다리가 마르기 전에 옷을 입어야지. 사냥꾼들이 근처 마을까지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더구나.
지안은 마지못해 젖은 바위 위로 기어 올라왔다. 은빛 꼬리가 서서히 갈라지며 인간의 매끄러운 다리로 변모하는 과정은 언제나 형언할 수 없는 이물감을 동반했다. 삼촌이 건네준 두꺼운 코트를 걸치며 지안이 물었다.
— 왜 저를 거두셨어요? 삼촌네 가족은 우리랑은 다르잖아요.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괴물들이라고… 동족들이 수군대는 걸 들었어요.
삼촌은 허허롭게 웃으며 지안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 괴물끼리 돕고 사는 거지. 우리는 죽지 못해 고통스럽고, 너희는 죽임당할까 두려워 고통스러우니. 같은 처지 아니겠느냐.
수십 년 후 c국
지안은 방랑하고 있었다. 삼촌의 곁을 떠나온 것은 순전히 지안의 병증 때문이었다. 첫 연인이었던 다나를 제 손으로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부채감은, 불사의 시간이 흐를수록 망각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뼈마디 사이에 박힌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며 통증을 유발했다.
그날도 지안은 다나와 함께 거닐던 C국의 광장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다 낡은 천막 안에서 기묘한 향을 피우던 노파와 눈이 마주쳤다. 노파는 지안의 눈동자 너머, 심해의 파란 그림자를 읽어낸 듯 기괴하게 웃었다.
— 찾는 이가 있구먼. 이미 흙이 된 자를.
—……당신이 뭘 안다고 나불거려.
— 다시 만날 게야. 인간으로 환생한 그 영혼이, 어느 날 어느 시에 네 눈앞에 나타날 것이니. 하지만 조심해라, 물고기 아가씨. 그때의 너는 그를 지킬 힘이 없을 테니.
‘다시 만날 그를 절대 죽게 하지 않겠다.’
인간의 생명은 너무나 나약하다. 고작 몇 십 년의 세월에도 스러지고, 작은 사고에도 불이 꺼진다. 그를 지키기 위해선 제 곁에 죽지 않는 치유자가 필요했다. 지안은 다시 삼촌의 가문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가문의 막내, 가장 자비롭고 따뜻한 기운을 가졌다는 일호를 타겟으로 삼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였다. 지안은 일부러 얇은 옷차림을 한 채 진료소 앞 골목에 쓰러져 있었다. 비에 젖은 몸에서 은근하게 배어 나오는 바다 냄새가 일호의 후각을 자극하기를 기다렸다.
— 저기요, 정신이 드세요?
그곳에는 예언 속의 다나가 아닌, 하지만 다나만큼이나 맑은 눈을 가진 사내가 서 있었다. 일호였다.
지안은 가느다란 손으로 일호의 소매를 붙잡으며 힘겹게 입술을 뗐다.
— 살려주세요. 갈 곳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