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우리에게 떳떳하지 못하게 되어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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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8 14:41조회 53댓글 9서하
{내일의 우리에게 떳떳하지 못하게 되어도}


-프롤로그

습관적으로 손 거스러미를 질겅질겅 씹으며 가계부를 봤다. 또였다. 돈이 부족했다. 가계부에는 전기세 같은 지출이 수두룩했다. 부모가 없다는 건 내가 만화책 속 여주인공이 아닌 이상 단점 밖에 안 되었다. 먼지 쌓인 가계부의 수입 칸은 하얀 백지가 대부분이었다. 먼지를 후 불며 한숨을 토해냈다.
“하아..”
가계부를 덮고 반으로 금이 간 휴대전화를 꺼냈다. 로넨 사회에서는 휴대전화를 금지했지만, 뭐, 나 같은 사람이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로넨 사회는 회색빛으로 물들어가는 ‘이미’ 잘못된 곳이었으니까. 휴대전화에는 앱이 딱 두 개 깔려있었다. 메모장과 메세지. 그렇게 메세지 앱을 눌렀다. 도착한 메세지 0건. 이러니 수입이 들어올 리가 없다. 불안함에 손을 더 세게 씹으며 메모장 앱을 켰다. 손톱 안쪽에서 검붉은 피가 살짝 배어나왔다.

-이중인격

2057년, 4월 25일

첫 의뢰.
사례금: 80만 원.

의외로 수월했다. 처음 칼을 봤을 때는 두려워서 잡기조차 힘들었다. 저걸로 사람을 죽인다니. 고작 18살인 내가. 내 속마음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빛나는 칼끝을 보며 마음을 다잡고 손에 힘을 줬다. 이번 의뢰자는 중년의 여성분이셨다. 후드티를 입고 있으셔서 얼굴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래도 어디 얼굴이 중요하겠는가. 사례금을 꽤 많이 주셔서 떨리는 손을 반대 손으로 붙잡고 뒤에서 하복부를 찔렀다. 의뢰인은 깔끔했다고 칭찬했지만 내 마음은 전혀 깔끔하지 않았다. 마치 덜 마른 빨래 처럼 찝찝했다.

나는 굳은살이 박힌 내 손을 내려다보며 볼펜을 필통에 굴려 넣었다. 더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일기는 짧게 쓰고 텅 빈 책꽂이에 꽂아넣었다. 손은 군데군데 붉게 물어뜯은 자국이 있었고, 핏줄이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창백했다. 나 자신이었지만 나 같지가 않은 하루. 그게 딱 오늘이었다.

다음날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나는 어제의 공포와 피로감의 잔해를 애써 모른 척 했다. 그리고 평범한 학생인 척을 하며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만졌다. 미용비가 없는 탓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까만 생머리를 가진 나는,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나 자신이 이중인격 같았다. 밤에는 태연하게 칼을 잡으면서 낮에는 무리에 섞여서 웃는 사람. 그 중 누구도 진짜 나는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학교를 향해 타박타박 발걸음을 재촉하면서도 미소를 계속 연습해야 하는 사람도, 사이코패스처럼 칼로 사람을 찌르는 사람도 난 싫었으니까. 두 사람 다 가짜 같았다. 머릿속에 회색의 생각 덩어리가 엉켜있는 기분이었다.
‘그럼 도대체 넌 뭘 원하는 건데.’
알 수 없는 질문들 사이에 파묻혀서 살아가는 게,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였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다가 앞을 보니 어느새 학교 앞이었다. 어차피 정말로 쓸데없는데.
학교에는 새학년 새학기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벌써 한 해가 지났다.
‘이번 학기도 즐겁게 보내봐요, 친구들~’
누가 누구의 친구라는 건지. 그리고 나에게 즐겁게 보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말하는 건가. 괜히 별 의미 없는 현수막에 토를 달았다. 그렇게 교실에 들어섰다. 빠르게 미소를 지은 채. 언제나 그랬 듯이 배시시 웃으며 모두에게 아침 인사를 했다. 버튼을 누른 것처럼.
“오늘도 좋은 아침~”
아이들은 모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진짜 ‘나’ 가 아닌 내가 만들어낸 사람에게. 그러다가 한 남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이상했다. 난 분명— 이제까지 나는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누구와도 눈을 맞춘 적이 없었다. 미소가 깨질까 봐 불안해서. 이 미소는 진짜가 될 수 없었으니까.
“응, 좋은 아침.”
그 남자아이가 빙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난 그저 특이한 아이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뒤, 자리에 앉았다.
’하아.. 오늘도 별 일 없기를.‘

-노란색은

그때 그 남자아이의 이름은 시한. 굳이 알고 싶지도 알 필요도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알게되었다. 매일매일 인사를 건네는 아이. 회색빛 교실
“저기.”
생각의 흐름을 끊는 게 무슨 능력인가, 얘는. 시한은 그 뒤로 시도때도 없이 말을 걸어대서 슬슬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여느떼처럼 빙긋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왜, 시한아?”
“...나, 너 좋아해도 될까?”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아니, 장난이어야 했다. 나 같은 놈에게 사랑은 독이 든 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가지고 싶어도, 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게, 바로 사랑이었는데.
“몇 달 동안 생각했거든. 나, 너 좋아하고 싶어, 아니, 좋아해.”
“..나도.”
의도치 않은 대답을 해버렸지만 다시 주워담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통제되지 않은 내 진심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 말을 듣자 시한의 얼굴이 환해졌다. 마치 생일선물이 마음에 든 아이처럼.
“웃지 마, 정들잖아.”
담담하게 그 말을 덧붙이고 나는 시한의 손을 잡으며 함께 웃었다. 이 순간 만큼은 진짜 나를 느끼고 싶었다.

2057년, 5월 2일

여섯 번째 의뢰.
사례금: 130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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