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당신이 행복하길 바랐을 뿐입니다」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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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04 06:00•조회 45•댓글 1•윤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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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아르센이 단상에 올라 잔을 내려놓았다.

연회장에 흐르던 음악이 끊기고, 시선이 일제히 단상으로 모였다.

“오늘, 황실에서 중요한 소식을 전하고자 합니다.”

손가락이 유리잔을 더 세게 감쌌다. 잔 속 붉은 포도주가 잔잔하게 흔들렸다.

“오늘부로, 황실에서는 저 아르센 로젠하임과 클레어 벨링턴의 약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할 것입니다.”

잠깐의 정적 뒤로 박수가 터졌다.

짝, 짝, 짝.

“황태자 전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황실의 혼인이 성사되는군요!”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나도 손뼉을 쳤다. 손바닥이 얼얼해질 때까지.

“축하드려요, 전하.”

목소리는 다행히 떨리지 않았다.

아르센이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처럼 편안한 얼굴이었다. 내게 특별히 차갑지도, 특별히 뜨겁지도 않은 얼굴.

“고마워, 아델리아.”

이름 하나에 손가락이 멈췄다.

이래선 안 됐다. 나는 아르센을 좋아한 지 벌써 7년이 되었다.

처음 그를 좋아한 날도 기억한다. 비가 쏟아지던 날, 그는 흠뻑 젖은 내 드레스 위로 제 우산을 기울였다.

“감기 걸리면 곤란하잖아.”

그 말이 나만을 위한 줄 알았다.

그 뒤로는 별것 아닌 일에도 의미를 붙였다. 먼저 불러 준 이름, 기억해 준 차의 향, 사람들 앞에서 내 편을 들어 준 한마디.

‘조금만 더 가까이 있으면 되겠지.’

‘내가 조금만 더 괜찮은 사람이 되면, 언젠가는 돌아봐 주겠지.’

그렇게 생각한 시간이 7년이었다.

하지만 아르센에게 나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그저 소중한 사람, 그뿐이었으니까.

그는 내 앞에 놓인 잔을 치우고, 시종에게 손짓했다.

“아델리아에겐 물만 주도록 해.”

“괜찮아요. 이 정도는...”

“술에 약하잖아.”

그는 내 손에서 잔을 빼앗듯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잔에 든 포도주를 전부 마셔버렸다.

나는 순간, 내 입술이 닿았던 잔이라 아르센이 뒤늦게 불쾌해하는 건 아닐까 싶어 눈썹을 살짝 올렸다.

하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에겐 아무렇지 않은 동작이었나 보다. 너무 익숙해 보여서, 더 곤란했다.

“아델, 정말 괜찮아?”

주변의 귀족들이 약혼 상대를 칭찬하는 사이에도 아르센의 시선은 내 얼굴에 남아 있었다.

나는 잔 대신 치맛자락을 살짝 움켜쥐었다.

“네. 괜찮아요. 제가 괜찮고 말고 할 일이 아니잖아요.”

“얼굴이 창백한데?”

“긴장해서 그래요. 전하께서 갑자기 이런 발표를 하실 줄은 몰랐거든요.”

아르센이 작게 웃었다.

“미안, 미리 말하면 네가 또 신경 쓸까 봐.”

“에이... 제가 뭘 또 신경 쓴다고 그러셨어요.”

“내 일이라면 뭐든 신경 쓰잖아.”

그 말에 입안이 바짝 말랐다.

아르센은 내가 웃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시선을 거뒀다.

“그래도 네가 축하해 주니 마음이 놓이는군.”

나는 여전히 입꼬리를 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바라시던 혼인이라면, 저도 기뻐요.”

순 거짓말이었다.

주변에서 다시 축배를 들자는 목소리가 올라왔다. 누군가는 약혼 상대가 아름답다고 했고, 누군가는 황태자와 완벽하게 어울린다고 했다.

나보다 훨씬 잘 어울릴 사람. 황태자의 곁에 서도 작아 보이지 않을 사람. 아르센이 사랑하게 될 사람.

“아델리아?”

그가 다시 불렀다.

“네.”

“정말 괜찮아?”

나는 이번에도 웃었다. 그런데 입술 끝이 자꾸만 떨렸다. 그래도 웃었다. 그가 아무것도 모른 채 웃어 주었으니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전하.”

축하의 박수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그 소리 속에서, 나는 웃는 얼굴을 더는 붙들 수 없었다. 나는 시종에게 짧게 양해를 구하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누가 말을 걸었는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정원에 발을 들이자 겨우 숨이 나왔다. 차가운 공기가 목을 긁었다.

“괜찮아.”

나는 벤치 등받이에 손을 짚었다. 차가운 나무가 손바닥을 식혔지만, 눈가는 계속 뜨거웠다. 방금까지 축하한다고 웃었으니, 이제 와서 울 수는 없었다.

아르센은 내게 거짓말한 적이 없었다. 오늘도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말했을 뿐이다.

문제는 내가 혼자 너무 오래 다른 의미를 붙여 왔다는 데 있었다. 7년이나.

“...왜 하필 오늘까지도.”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의 약혼 소식을 들은 순간보다, 내 이름을 부르며 웃던 얼굴이 더 선명했다.

어릴 때 계단에서 굴러 무릎을 까진 날도 그랬다.

“아델리아! 움직이지 마.”

아르센은 피가 배어 나오는 내 치맛자락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그러고는 손수건을 꺼내 상처 위에 꾹 눌렀다.

“아픈 건 난데 왜 전하가 더 심각한 얼굴을 하세요?”

“네가 울 것 같아서.”

“안 울어요.”

“그럼 손은 왜 떨려?”

그가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그날 밤, 나는 그 손을 씻지 않았다. 손바닥에 남은 온기가 사라질까 봐.

하지만 이제는 그런 기억을 붙잡고 있을 자리조차 없었다.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손등을 적셨다.

“이건... 먼지 때문이야.”

내가 생각해도 내 변명이 우스웠다. 나는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닦은 자리가 다시 젖었다.

아르센은 내게 다정했다. 내가 좋아하는 차의 향을 기억했고, 아픈 곳은 없는지 먼저 물어봐 주었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다정함이 숨 쉬듯 자연스러운 사람이었을 뿐, 그의 다정은 내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걸 진작 깨달았어야 했는데, 정말 바보같이...

아니, 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는 일만큼은, 아직도 아팠다.

그의 곁에 설 사람으로는 나보다 훨씬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었다. 모두가 그렇게 말했고,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된 일이야.”

말끝이 떨렸다.

황태자에게는 황태자와 나란히 걸을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며 이름 한 번 불리기를 기다리는 데 익숙한 사람일 뿐이었다.

웃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목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급히 입을 틀어막았는데도 소용없었다.

“흐, 흐으...”

나는 결국 정원 벤치 옆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연회장의 음악이 멀리서 다시 들려왔다. 누군가 웃었고, 잔이 부딪혔다.

그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숙인 순간, 참아 두었던 울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벤치 아래로 눈물이 계속 떨어졌다.

“좋아했어...”

아무도 듣지 못할 목소리였다.

“정말 좋아했단 말이야...”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웅크리고 있었다.

“이런 곳에 숨어 계셨습니까?”

능글맞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정원 입구에 카시엘이 서 있었다. 웃고 있었지만, 눈은 내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카시엘 대공 각하?”

“네. 그래도 저를 바로 알아봐 주셨네요. 사실 귀신이라며 소금이라도 뿌리면 어쩌지, 했거든요.”

“감히 제가 대공 각하께 그럴 리가요...”

나는 황급히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울지 않았다는 듯 고개까지 반듯하게 세웠다.

카시엘의 시선이 내 붉어진 눈에 닿았다.

“그럼 정원에서 양파를 써셨습니까?”

“양파는 어디서 튀어나온 거죠.”

“아쉽군요. 아주 훌륭한 변명이었는데.”

카시엘은 연회장 안의 영애들에게도 저런 식으로 말을 걸곤 했다. 그러니 지금도 그닥 특별한 의미는 없을 것이다.

카시엘이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하얀 천의 끝에는 연한 보랏빛 붓꽃이 수놓아져 있었다.

“이걸 쓰시죠.”

“괜찮아요. 조금 있으면...”

“괜찮은 분은 눈을 그렇게 닦지 않습니다.”

그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받아 들었다. 손끝에 닿은 천은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보라색 붓꽃이네요.”

“아, 마음에 안 드십니까?”

“제가 좋아하는 꽃인 걸 알고 고르신 것 같아서요.”

“우연입니다. 저는 사교계 영애들에게 원래 친절하거든요.”

카시엘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손수건의 자수를 내려다보았다. 손수건으로 눈가를 누르자 카시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그가 내 손목을 잡았다.

“아...”

갑작스러운 온기에 손이 멈췄다. 카시엘은 내 손에서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세게 문지르면 더 붓습니다.”

“제가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매번 눈을 비비시던데요.”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매번이라니요? 저희가 그리 가깝게 지낸 기억은 없습니다만...”

카시엘은 대답 대신 웃었다. 손수건이 눈가를 가볍게 스쳤다.

“아르센 전하 때문에 우신 겁니까?”

손끝이 굳었다.

“아니요. 그건... 정원에 벌레가 많아서요.”

“벌레 때문에 ‘좋아했어’ 라고 말하며 우는 분은 처음 봅니다.”

“들으셨어요?”

“아주 가까이 있었거든요.”

그는 여전히 가벼운 얼굴이었다. 다만 손수건을 쥔 손가락이 잠깐 멈췄다.

“오늘 발표된 약혼이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그런 뜻이 아니에요.”

나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입술을 깨물었다가, 익숙한 말버릇처럼 웃음을 덧붙였다.

“전하께서 행복하시면 됐어요. 저는 정말 괜찮 - ”

“아델리아.”

이번에는 내 이름을 끊어 부르는 목소리가 낮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가 이리 친한 사이였던가.

왜인지 낯익고, 또 낮으면서도 부드러운 그의 한마디가,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카시엘이 손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아니, 그럴 리 없었다. 그렇게 티를 냈을 리 없었다. 아르센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7년 동안 얼마나 조심했는데.

카시엘은 그런 내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입꼬리를 더 올렸다.

“그럼 대공인 제가 틀렸다는 걸 증명해 보시죠.”

“어떻게 증명하라는 건데요?”

“간단합니다. ‘카시엘 대공은 레이디 아델리아를 아주 오랫동안 짝사랑해 왔다.’ 크게 3번만 외쳐 보십시오.”

“제가요? 정말이지... 각하께선 사람을 놀리는 데 아주 능숙하시네요. 그런 헛소리를 3번이나, 그것도 큰소리로 하라니요.”

카시엘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상처받았습니다. 저는 그저 슬픈 분을 웃게 해 드리려던 것뿐인데.”

“이렇게 우는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울지 마세요, 힘내세요, 그런 말씀을 드릴까요? 너무 재미없잖습니까.”

그는 정말 평소처럼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인지, 그 웃음이 조금 우스워서인지 나도 결국 입꼬리를 올렸다.

“대공 각하께서는 참 이상한 분이네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카시엘이 손수건을 다시 내밀었다.

“아르센 전하를 좋아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닙니다.”

“ ... ”

“다만 전하께서 다른 사람을 선택하셨다면, 계속 울고 있을 필요는 없지요.”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나는 손수건을 손에 구겼다.

“그런 걸 위로라고 하시는군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전혀 위로되지 않았어요.”

“이상하군요. 사교계 영애들은 제 말에 늘 감동하던데.”

“그분들은 대공 각하께서 자기에게만 그러신다고 생각했나 보죠.”

아차,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카시엘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나는 괜히 손수건의 보랏빛 자수를 문질렀다.

“죄송해요. 오늘은 제가 좀...”

“괜찮습니다. 오늘 정도는 투정 부리셔도 되니까.”

카시엘이 방금 무심코 건넨 말은, 이상하게 부드러워서.. 나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고마워요.”

손수건을 돌려주려 하자 카시엘이 손을 내저었다.

“가지십시오. 붓꽃을 좋아하신다면서요.”

“빌린 것뿐이에요. 지금 돌려드릴게요.”

"흐음.. 지금은 되었으니, 다음에 돌려주십시오."

"저희에게 다음이 있을까요."

본의 아니게 튀어나온 말에 그의 미소가 잠깐 멎었다. 그러나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성심껏 위로해 드렸는데.”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아델리아.”

낮게 불린 이름에 고개를 들자, 카시엘이 장난스럽게 눈을 휘었다.

“그렇게 울 거면 차라리 나를 좋아하지 그랬습니까.”

잠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곧 헛웃음이 흘렀다.

“대공 각하께서는 정말 끝까지...”

“농담입니다.”

그가 먼저 덧붙였다.

그래, 농담일 것이다. 카시엘이 나를 좋아할 리 없었다. 그는 원래 모두에게 친절했고, 나는 오늘 그 친절을 조금 빌려 쓴 것뿐이었다.

“고마워요, 카시엘 대공.”

나는 손수건을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돌아갈게요.”

“조심히 가십시오. 손수건은 꼭 돌려주시고요.”

“잊지 않을게요.”

나는 이번에도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정원을 빠져나왔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카시엘은 손을 내린 채 정원 출구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나를 좋아하지 그랬습니까.”

대답은 없었다.


* * *


그날 밤, 카시엘의 서재 책상 위에 오래된 상자가 놓였다. 그가 뚜껑을 열자 빛이 바랜 리본 하나가 드러났다.

카시엘은 리본을 집지 못한 채 손끝만 가까이 가져갔다.

“이번에는 정말 돌려받아야겠군요.”

그는 한참 동안 리본을 내려다보다가, 상자의 뚜껑을 천천히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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𝙱𝚢_ 작가 윤여름
https://øㅕ르ㅁl_ᨐฅ_.enn.kr

이번 소설은 로맨스 판타지 삼각관계 장편소설입니다.
현재 결말까지 결론난 설정이오니, 조금 늦더라도 완결을 목표로 연재해보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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